살아 있기 때문에 해보고 싶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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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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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이 되자 문득 마음이 이상했다.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거리며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더 나이가 들면 참 심심하겠다.’
지금은 일요일 하루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내일이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해야 할 일이 있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고, 나를 필요로 하는 일들이 있다.
그런데 언젠가 일의 양이 줄고, 자녀들이 각자의 삶으로 가고,
지금까지 나를 움직이게 했던 역할들이 하나둘 사라진다면 그때의 하루는 어떻게 채워질까.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노후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아직 현실적인 준비가 충분하지 않다는 마음도 있다.
미래의 생활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준비되어 있다면 지금보다 조금 더 편안하게 무언가를 즐길 수 있을 텐데,
아직은 마음 한구석에 현실적인 계산이 남아 있다.
그래서 노후를 준비한다는 것은 돈만 준비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실제로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 기반 위에서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 준비하는 일이다.
지금까지의 삶에는 ‘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가족을 돌보고, 아이를 키우고, 일을 하고,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주어진 역할을 잘 해내는 것. 그런 삶에서는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뒤로 밀리기 쉽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질문이 달라져야 할 것 같다.
‘무엇을 해야 하지?’가 아니라
‘무엇을 해보고 싶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살아 있기 때문에 해보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을 생각하다 보니 자녀와의 분리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부모와 자녀의 분리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이 아닌 것 같다.
아주 천천히, 의식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조금씩 진행된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좋아하는 것을 아이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특히 엄마에게 아이는 자신의 몸에서 나온 존재이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아이와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한때 집에서 키우던 화초에 꽃이 피어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적이 있다.
“이리 와봐. 꽃이 피었네.”
그런데 아이는 뜻밖의 말을 했다.
“엄마, 내가 그것까지 해야 돼요?”
당시에는 서운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보고 싶었던 마음이 거절당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그 말은 아이가 자신의 주권을 드러낸 순간이기도 했다.
‘엄마가 좋아한다고 내가 좋아해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 아이에게는 엄마와 자신이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날에는 가족 안에서 엄마를 가볍게 대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아이가 어느 순간 이렇게 말했다.
“엄마에게 그러면 안 돼.”
그 순간 집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단순히 엄마를 편드는 말이 아니었다.
아이가 엄마를 처음으로 한 사람으로 바라본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도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야.’
그때까지 엄마는 가족을 위해 늘 무언가를 해주는 사람이었다.
가족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챙기고, 맞춰주고, 돌보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가족 안에서 가장 편하게 대해도 되는 사람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아이의 한마디는 그 관계에 작은 경계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나는 엄마와 다른 사람이야.’
였다면, 그다음에는
‘엄마도 나와 같은 한 사람이야.’
가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정서적인 분리가 시작되었다.
이후 아이가 취업을 하면서 물리적인 거리도 생겼고,
결혼하면서 또 다른 생활 단위가 만들어졌다.
그 과정은 아주 천천히 이루어졌다.
그래서 의식하지 않았다면 무엇이 달라졌는지도 모를 만큼 자연스러웠다.
다행히 마음과 관계를 공부하고 있었기에,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조금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분리는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의 삶을 인정할 수 있는 적절한 거리를 만들어가는 일이었다.
다만 잘 분리되었다고 해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가는 것을 보면 마음은 놓인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너무 멀리 있으면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그리움과 안도감은 함께 있을 수 있다.
‘네 삶을 잘 살아가서 다행이다.’
와
‘그래도 가까이 살았으면 좋겠다.’
는 서로 모순되는 마음이 아니다.
오히려 어쩌면 건강한 분리 이후에야 이런 마음을 편안하게 가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붙잡지 않으면서 그리워할 수 있고, 간섭하지 않으면서 관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각자의 삶으로 가고 나면 부모에게는 하나의 빈자리가 생긴다.
그 빈자리는 처음에는 외로움이나 허전함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자리에 새로운 질문이 들어온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어쩌면 지금까지는 아이의 삶을 잘 살아내도록 돕는 것이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다면,
이제는 나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일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살아 있기 때문에 해보고 싶은 것들이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는 것.
잘해야 해서가 아니라 궁금해서 해보는 것.
필요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가서 하는 것.
배워보고 싶었던 것을 배우고, 가보고 싶었던 곳에 가고,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천천히 산책하고, 아무 이유 없이 바다를 보러 가는 것. 어쩌면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행동의 크기가 아니라 그 안에 ‘내가 원한다’가 들어 있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인 준비도 필요하다. 경제적인 기반이 충분하지 않다면 마음껏 즐기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삶을 준비하는 일은 현실적인 노후 준비와 삶의 내용에 대한 준비가 함께 가야 한다.
얼마가 필요한지 계산하는 것만큼, 그 돈으로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충분히 준비한 뒤에도 정작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조금씩 찾아보고 싶다.
나는 살아 있기 때문에 무엇을 해보고 싶은가.
어쩌면 이 질문은 노후를 준비하는 질문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준비하는 질문인지도 모른다.
한 시대의 삶이 조금씩 끝나고 있다.
아이를 키우는 삶, 가족의 필요에 반응하는 삶,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삶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고 있다.
그렇다고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 지금까지 충분히 살아보지 못했던 내가 들어올 수 있다.
그동안 해야 했던 것들 사이에서 뒤로 미루어두었던 것들, 좋아하는 줄도 몰랐던 것들,
시간이 없어서 시도하지 못했던 것들, 누군가에게 필요하지 않아도 나에게는 의미가 있는 것들.
그것들을 하나씩 발견하는 시간.
어쩌면 그것이 다음 삶일 것이다.
오늘 일요일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느낀 묘한 심심함은
그래서 단순히 할 일이 없어서 생긴 감정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한 시대의 삶이 조금씩 끝나고, 그 자리에 다음 삶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몸이 먼저 알아차린 것.
아직 그 다음 삶의 모습이 선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물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을 해보고 싶은 사람인가.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서 언젠가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살아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해보고 싶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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