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욕구의 나이는 몇 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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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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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에서 시원한 빗줄기가 내리고, 그 사이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여름이 한 계절을 잘 보내고 가을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 같다.
평온하면서도 조금 서글픈 저녁이다.
계절을 바라보다 문득 내 삶의 계절을 생각했다.
나는 그동안 떡잎처럼 살아온 것 같았다.
씨앗에서 올라온 떡잎은 싹이 자라면 떨어져 그 싹의 양분이 된다.
누군가가 자라도록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주는 존재다.
나도 그렇게 살아온 것은 아닐까.
다음 세대를 위해 내 것을 내어주고, 어느 순간 뒤로 물러나는 삶.
그 생각에서 ‘내 계절이 있기나 했나’ 하는 서글픔이 올라왔다.
그런데 곧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이 내 계절일지도 모른다.
5년 뒤의 내가 지금을 돌아본다면, 지금이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지금 그것을 충분히 느끼지 못한다면, 현재의 충만함도 지나간 뒤에는 결핍으로 남을 것이다.
나는 지금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것들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도 마음 한편에는 사회가 말하는 ‘좋은 삶’을 가상의 기준으로 놓고 있었다. 좋은 집이 그랬다.
햇빛이 잘 들어오고, 적당히 넓고 쾌적한 공간. 요리가 하고 싶어지는 주방과 샤워가 하고 싶어지는 욕실.
앞 베란다에는 꽃과 식물이 있고, 아이들이 명절에 왔을 때 편안하게 쉬었다 갈 수 있는 집.
누군가 그 집을 보고 “참 좋은 집이네요.”라고 말해준다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아무도 몰라도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
그러다 문득 질문이 생겼다.
이 욕구의 나이는 몇 살이지?
현재의 욕구처럼 보이는 것 안에 오래된 결핍이 들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받지 못한 사랑이나 보호를 좋은 집이나 좋은 물건으로 채우려는 것은 아닐까.
‘나도 좋은 것을 받고 싶어.’
그 말을 떠올리자 슬픔이 올라왔다.
어린 시절 내 생일은 아버지 생신과 같은 달이었다.
내가 열흘 먼저 태어났고, 엄마는 늘 아버지 생신상을 차릴 때 내 생일상도 함께 차려주었다.
미역국, 찰밥, 생선구이, 김, 나물과 밑반찬. 정성스러운 상이었지만 나는 늘 못마땅했다.
아마 어린 나는 ‘오늘은 나를 위한 날’이라는 느낌을 갖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의 집을 떠올렸을 때는 결핍이 없었다.
넓은 마당과 텃밭이 있었고, 뒤안에는 과일나무도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집이기도 했다.
나는 당연히 좋은 집에서 살 것이라고 생각했고,
지금처럼 이 나이에 주거를 고민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좋은 집에 대한 욕구를 어린 시절의 결핍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때 어린 나에게 생일상을 차려준다면 무엇을 올리고 싶은지 떠올려보았다.
그런데 뜻밖의 장면이 나타났다.
싱싱한 채소가 있고, 그 위에 빨갛고 동그란 순무를 얇게 썰어 몇 개 올려놓았다.
파스타가 있고, 빵 몇 조각이 잘려 있다.
나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러다 기억이 났다.
십 년쯤 전 유럽을 여행했을 때 먹었던 호텔 조식이었다.
빵 위에 삶은 계란을 으깨 올려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샐러드와 함께 먹었다.
음식이 깔끔하고 건강한 느낌이었고, 무엇보다 내 입에 너무 잘 맞아서 놀랐던 기억이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 생일상은 어린 시절의 결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경험하고 좋아하게 된 것에서 나온 이미지였다.
엄마가 차려준 생일상에는 엄마가 알고 있는 음식이 있었고,
아이들에게 차려준 생일상에는 내가 물려받은 방식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내가 나를 위해 차리고 싶은 생일상에는 내가 살아오며 발견한 나의 취향이 들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좋은 집에 대한 욕구도 그렇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집이 아니다.
햇빛이 들고, 꽃이 있고, 내가 요리하고 싶고, 편안하게 씻고, 아이들이 와서 쉬어갈 수 있는 집이다.
그것은 사회가 정한 ‘좋은 집’보다 내가 살아보며 좋다고 느낀 삶의 감각에 가깝다.
그래서 욕구가 올라올 때마다 과거의 결핍부터 찾을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신 물어볼 수 있다.
이 욕구의 나이는 몇 살이지?
어린 시절에서 온 것인지, 오래전 경험에서 온 것인지,
사회가 만들어놓은 기준인지, 아니면 지금의 내가 새롭게 원하는 것인지.
욕구의 나이를 찾는 일은 과거를 파헤치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욕구를 정확히 알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원했던 것은 ‘좋은 것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그것을 나에게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생일상도 내가 고를 수 있다.
신선한 채소와 빨간 순무, 파스타와 빵.
좋은 집도 내가 고를 수 있다.
햇빛이 들어오고, 꽃이 있고, 내가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집.
그렇다면 지금은 어쩌면 정말 내 계절인지도 모른다.
내 계절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이제야 내 계절에 무엇을 놓고 싶은지 알게 된 것.
5년 뒤의 내가 오늘을 돌아보며 ‘그때가 참 좋았는데’라고 말하지 않도록,
아직 오지 않은 삶을 가상으로 만들어 지금을 결핍으로 만들지 않으려 한다.
비가 내리고 귀뚜라미가 운다.
여름은 자기 계절을 잘 보내고 있다.
나도 이제 내 계절을 조금 더 자세히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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