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포유
칼럼 포유
칼럼 포유

삶의 글에는 빈 의자가 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9-01 13:25 조회30회 댓글0건

본문


그동안 나는 상담 장면에서 무언가가 연결되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상담을 하다가 알고 있던 이론이 떠오르면 ‘아, 이것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는구나’ 싶었다. 

경험과 이론이 만나는 순간을 붙잡아 글로 쏟아냈다. 

생각이 떠오르면 적었고, 하나의 장면에서 또 다른 의미가 발견되면 그것도 기록했다.


아마 그동안의 글쓰기는 그런 의미에서 생존의 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놓치지 않기 위해 붙잡고, 이해하기 위해 연결하고, 남겨두기 위해 계속 달리는 글.


그런데 오늘 아침부터 조금 달라졌다.


‘빈 의자’라는 말을 생각하다가 오래전 장면들이 떠올랐다.


버스 정류장에 지금처럼 의자가 잘 갖추어져 있지 않던 때가 있었다. 

사람들은 버스를 기다리며 기둥에 기대 있었고, 바닥에 쪼그려 앉기도 했고, 가방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앉기도 했다. 

그러다 간혹 의자가 있는 정류장을 만나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산책길에서도 그랬다.


다리가 아주 아픈 것도 아닌데 빈 의자가 보이면 얼른 가서 앉곤 했다. 

걷다가 잠시 앉아 있는 것. 꼭 쉬어야 할 만큼 지친 것은 아니어도, 의자가 있다는 것만으로 잠시 머물고 싶어졌다.


의자는 사람을 머물게 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는 잠깐 쉬어도 돼.’


누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의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30대 때 알던 한 사람의 글이 떠올랐다.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자신이 끄적인 글을 보여준 적이 있다.

글에는 장면만 있었다.


나는 묘사는 알겠는데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런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글이라면 결국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야 그 글이 조금 이해되는 것 같다.


그 사람은 어쩌면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장면 하나를 내어주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후의 버스 정류장에 사람들이 서 있다.

한 사람은 기둥에 기대고, 한 사람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버스가 오자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난다.
그리고 다시 정류장이 비어 있다.


이것만으로도 이상하게 마음이 뭉클하다.


기다림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고, 떠남이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는 오래전 버스 정류장을 떠올릴 것이고, 누군가는 기다렸던 사람을 떠올릴 것이고, 

누군가는 사람이 떠난 뒤의 빈자리를 떠올릴 것이다.


장면은 그대로인데, 그 안에 각자의 기억이 들어온다.


어쩌면 삶의 글에는 빈 의자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이 독자를 어디론가 끌고 가는 대신, 잠시 앉아 있을 자리를 하나 마련해주는 것.


그러고 보니 나에게는 색에도 그런 자리가 있었던 것 같다.


박사를 졸업하고 처음 찍었던 증명사진에는 흰색 셔츠와 하늘색 재킷을 입은 내가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어려운 일을 겪고 있어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시민공원을 지나가는데 정류장 하나가 하늘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정류장에 흔히 쓰이는 색은 아니어서인지 그냥 지나치면서도 기억에 남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하늘색은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있었던 것 같다.


힘들었던 시절 출근길, 차창으로 비친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았다. 

공원 운동기구에 누워 하늘을 오랫동안 바라보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는 엄마가 만들어주신 옷 중 좋아했던 옷이 있었다. 

흰색 블라우스에 등에 X자로, 앞에서는 11자로 이어지는 하늘색 주름치마였다.


혼자 놀던 시절에는 하늘색 꽃무늬 이불을 뒤집어쓰고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 

두 팔과 두 다리를 들어 올렸다. 전등을 통해 비치는 이불의 꽃무늬를 바라보며 놀았다.


서로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는 장면들인데, 지금 돌아보니 그 사이에 같은 색이 있었다.


하늘색.


색이라는 것은 참 기묘하다.


우리는 어떤 일을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그때의 색은 기억하고 있을 때가 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같은 색을 만나면 설명할 수 없던 기억 하나가 문득 돌아온다.


어제 아침 출근길에는 하늘에 남아 있는 낮달을 사진으로 찍었다.


오늘은 운동을 마치고 차를 타고 오다가 차창에 비친 구름이 동물처럼 보여 또 사진을 남겼다.


예전에도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지금의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은 조금 다른 것 같다.


그때는 힘든 시간을 견디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면, 지금은 그냥 하늘을 보다가 마음에 들어 사진을 찍는다.


낮달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구름이 왜 동물처럼 보이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눈에 들어왔고, 잠시 바라보았고, 남겨두고 싶었다.


어쩌면 이것이 삶의 글로 가는 변화인지도 모르겠다.


생존할 때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설명해야 했다. 

놓치지 않으려고 붙잡고, 의미를 찾아내고, 계속 앞으로 달려야 했다.


하지만 삶에서는 때로 그냥 바라볼 수 있다.


하나의 장면 안에 잠시 머물 수 있고, 어떤 기억이 떠올라도 서둘러 해석하지 않을 수 있다. 

지나가다 빈 의자가 보이면 다리가 아프지 않아도 잠시 앉을 수 있고, 

차창에 비친 구름이 마음에 들면 사진 한 장을 찍을 수도 있다.


이제 글을 쓸 때도 무엇을 더 말할 것인가보다 어디에 빈 의자를 하나 놓을 것인가를 생각해보고 싶다.


내가 다 설명하지 않은 자리에 독자가 자기 기억을 가져와 앉을 수 있도록.


좋은 글은 어쩌면 모든 것을 말하는 글이 아니라, 누군가 잠시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는 글인지도 모르겠다.


삶의 글에는 빈 의자가 있다.


걷다가 앉아도 되고,
잠시 바라보다 다시 일어나도 된다.


그리고 때로는 그 의자에 앉아 하늘을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