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포유
칼럼 포유
칼럼 포유

부르는 사람과 오는 사람 사이

페이지 정보

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10-04 14:04 조회15회 댓글0건

본문


영화 《가능한 사랑》에서 한 남자가 휘파람을 분다.
그러자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가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온다.


그 장면을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친구를 부르는 것과
부르면 오는 사람을 부르는 것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친구에게 “와줄래?”라고 말하는 것과
휘파람을 불면 당연히 달려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닐 것이다.


친구는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내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다.

그 선택이 가능할 때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서로의 자리가 열려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한 사람은 부르는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은 오는 사람이 된다.


처음에는 부탁이었을 것이다.

“이것 좀 도와줄래?”

그 부탁이 반복되면서 기대가 되고,
기대가 역할이 되고,
역할이 오래 지속되면 어느새 관계의 구조가 된다.


“너는 원래 오잖아.”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그렇게 한 사람은 늘 이끌고,
한 사람은 늘 따른다.


형제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생긴다.

어릴 때부터 한 사람이 결정을 잘하고 앞장섰다면 다른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단순한 행동의 차이를 넘어 관계의 자리가 된다.

밖에서는 누구보다 자기 의견을 잘 말하는 사람도
형제 앞에서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자리로 돌아가기도 한다.


부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남편이 결정하고 아내가 따르는 관계가 반드시 서로 사랑하지 않는 관계라는 뜻은 아니다.
두 사람은 나름의 방식으로 서로를 아끼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함께 산다는 것과 동반자로 산다는 것은 조금 다를 수 있다.


동반자라면
한 사람이 결정할 때 다른 사람도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필요하면 거절할 수도 있어야 한다.


오늘은 내가 앞장서고
내일은 당신이 앞장설 수도 있다.


직장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상사가 업무를 지시하고 직원이 그것을 수행하는 것은 조직의 구조 안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관계에서는 각자의 역할이 필요하다.

상사는 책임을 져야 하고
직원은 맡은 일을 수행해야 한다.


문제는 그 역할이 조직 밖으로까지 따라 나올 때다.

직장에서 상사였다고 해서
친구 사이에서도 늘 결정하는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직장에서 누군가의 일을 도와주는 위치에 있다고 해서
사적인 관계에서도 늘 상대를 돌보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하나의 관계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공적인 관계에서는
그 자리에 맞는 역할과 태도가 필요하지만,

사적인 관계에서는
그 역할만으로 상대를 만날 필요가 없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내가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사적인 관계에서는
“나는 이 사람과 어떤 모습으로 함께 있고 싶은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래서 공적인 관계의 질서와 사적인 관계의 질서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상담실에서는 상담자이고
센터에서는 운영자이지만,

친구 앞에서는 그냥 한 사람일 수 있다.


늘 누군가를 이해하고 받아주는 사람이
친구에게까지 언제나 이해하고 받아주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늘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이
가까운 사람의 문제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적인 관계에서는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그냥 나로 있을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직장인의 관계에서도 이 차이를 생각해볼 수 있다.


직장에서는 사람을 만날 기회가 많다.

매일 얼굴을 보고,
함께 일하고,
점심을 먹고,
회의를 하고,
때로는 퇴근 후 술자리도 함께한다.

그래서 직장 안에서는 꽤 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 관계의 상당 부분은
공적인 역할을 통해 만들어진다.


나는 이 회사의 직원이고
당신은 나의 상사이거나 동료다.

그 역할이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다 정년이 되어 그 자리를 떠나면
일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게 해주던 구조도 함께 사라진다.


그때 비로소 알게 될 수도 있다.

나는 이 사람과 정말 친구였던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같은 직장에서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물론 직장에서 만난 사람이 진짜 친구가 될 수도 있다.

오랜 시간 함께 일하며 서로의 삶을 알고,
직장을 떠난 뒤에도 만나고,
직책이나 업무와 상관없이 관계가 이어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공적인 관계만으로 사람을 만나온 사람에게는
직장을 떠나는 순간 관계의 빈자리가 한꺼번에 드러날 수도 있다.


그래서 사적인 관계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직급도 없고,
직책도 없고,
내가 무엇을 해주는 사람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그냥 나로 만날 수 있는 관계.


“무슨 일을 하세요?”가 아니라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라고 물을 수 있는 관계.


공적인 관계는 사람을 연결해준다.


하지만 그 관계를 오래 이어주는 것은
반드시 역할만은 아니다.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필요한 것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으로 만나는 관계보다
그냥 어떤 사람으로 만나는 관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모든 관계가 완전히 수평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마다 가진 능력과 경험이 다르고,
어떤 일을 더 잘하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앞에 설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누가 항상 앞에 있느냐가 아니다.


그 자리를 바꿀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내가 도움을 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가.


내가 결정하는 날도 있고
상대가 결정하는 날도 있는가.


한 사람이 늘 부르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이 늘 오는 사람으로 굳어 있지는 않은가.


관계의 자리가 오래 굳어지면
그 자리가 불편한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오히려 익숙한 자리가 편하다.

늘 결정하는 사람은 계속 결정하는 것이 편하고,
늘 양보하는 사람은 양보하는 것이 편할 수도 있다.


익숙함은 때로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계의 구조가 고정되면
사람은 상대에게 그 자리를 계속 지켜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한 사람은 계속 자신을 따라주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은 계속 자신을 이끌어주기를 바랄 수 있다.


그런데 또 다른 형태도 있다.

내가 살아가는 삶과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고 싶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과 비슷한 삶의 방향을 가진 사람을 가까이 두고 싶어 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생존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
어느 순간 삶을 다시 선택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해보자.


일을 줄이고,
자신의 관심을 따라가고,
공부를 하고,
글을 쓰고,
작가로 살아가기 시작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내 주변에도
그런 삶의 감각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 수 있다.


그 사람이 꼭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질 필요는 없다.

작가일 필요도 없고,
경제적 형편이 같을 필요도 없다.


다만 내가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들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고,
내가 선택한 삶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

나 역시 그런 사람과 가까이 지내고 싶을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경제적인 수준이나 생활방식의 비슷함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친구도 자신과 비슷한 형편이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나,
비슷한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과 어울리고 싶어 할 수도 있다.


그 마음 자체를 이상하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과 너무 동떨어진 관계 안에서는
때로 외로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나와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이면 좋겠다”와

“내 친구라면 이 정도는 살아야 한다”는
전혀 다른 말이다.


전자는 내가 어떤 삶을 선택했고
그 삶을 누구와 나누고 싶은지에 대한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후자가 되는 순간
상대는 한 사람으로 존재하기보다
내가 편안함을 느끼기 위한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다시 같은 질문으로 돌아온다.

나는 관계 속에서 상대를 있는 그대로 만나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편안한 자리에
상대를 놓아두고 만나고 있는가.

한 사람은 계속 부르는 사람이어야 하고
다른 사람은 계속 오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나와 비슷한 삶을 살아야만 가까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모양은 다르지만
그 안에는 상대가 내가 익숙한 관계의 자리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내가 어떤 사람과 가까이 지낼 것인지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삶이 달라지면 관계도 달라질 수 있다.


생존을 위해 살아갈 때와
내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을 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기준이 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예전에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가까웠다면
이제는 서로의 삶을 존중하는 사람이 가까울 수도 있다.

예전에는 내가 참고 맞춰주는 관계가 익숙했다면
이제는 서로 말하고 선택할 수 있는 관계를 원할 수도 있다.


이것은 사람을 밀어내는 일이 아니라
내 삶의 자리를 선택하는 일일 수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도
상대에게 나와 같은 자리에 오라고 요구하는 것과
내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선택하는 것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내 삶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삶을 함께 나눌 사람을 선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에게도
자기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래서 관계가 깊어진다는 것은
서로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를 수 있는 것을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작가로 살아가고
너는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너는 다른 것을 중요하게 여길 수 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의 삶을 존중하며
친구일 수 있다.

관계의 자유는
상대가 내 자리에 와주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만날 수 있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오래 굳어진 관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바꾸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늘 따르던 사람이 어느 날 자기 의견을 말하면
스스로도 어색하다.

늘 양보하던 사람이 거절하면
“내가 왜 이러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주변에서도 말할 수 있다.

“네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하지만 어쩌면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 아니라
그 관계에서 너무 오랫동안 그런 역할을 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자리에 서는 것이 어색한 것은
그 자리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관계가 살아 있다는 것은
한 사람이 늘 부르는 사람이거나
다른 사람이 늘 오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닐 것이다.


오늘은 내가 부를 수 있고
내일은 내가 달려갈 수도 있는 것.

필요할 때는 가까이 가고
필요할 때는 거리를 둘 수도 있는 것.

공적인 자리에서는 각자의 역할을 존중하고,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 역할을 내려놓고
한 사람으로 만날 수 있는 것.

서로 다른 삶을 살면서도
상대의 삶을 자기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는 것.


어쩌면 친구란
부르면 오는 사람이 아니라
부를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선택을 서로에게 허락할 수 있을 때
두 사람은 비로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해놓은 자리에 두는 관계에서 벗어나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서로를 만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 아닐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